과학기술과 시민의 의사결정
본문원자력 발전소를 더 지을지, 쓰레기 소각장을 어디에 둘지, 자동차 안전 기준을 얼마나 높일지 같은 문제는 과학 자료가 있어야 판단할 수 있다. 그런데 같은 자료를 보고도 어떤 시민은 찬성하고 어떤 시민은 반대한다. 한쪽이 자료를 잘못 읽은 것일까? 과학으로 답할 수 있는 부분과 답할 수 없는 부분은 무엇이며, 시민은 어떻게 함께 결정할 수 있을까?
3.6.1사실과 가치
과학 자료는 '무엇이 일어날 수 있고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가'라는 사실에 답한다. 그런데 '그 위험을 감수할 만한가'는 가치의 문제이다. 같은 위험이라도 사람마다 무엇을 더 무겁게 여기는지가 다르다. 드물지만 한꺼번에 큰 피해를 주는 재난을 특히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고, 자주 일어나는 작은 피해를 더 중요하게 보는 사람도 있다. 미래 세대, 지역의 형평성, 경제적 이익을 얼마나 고려할지도 다르다.
위험의 기댓값은 \(\text{확률} \times \text{피해}\)로 계산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느끼는 위험은 기댓값뿐 아니라 피해의 크기, 통제 가능성, 자발성, 공정성에 따라 달라진다. 과학은 기댓값을 계산해 주지만, 무엇을 얼마나 무겁게 볼지는 시민이 정한다.
그림 1에서 지수를 바꾸어 보자. 지수가 1이면 A와 B의 위험이 같다. 지수가 1.2이면 B가 A보다 4배 위험하게 느껴지고, 1.5이면 30배 넘게 위험하게 느껴진다. 따라서 두 시민이 같은 숫자를 보고도 다른 결론에 이르는 것은, 한쪽이 틀려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가치를 더 중요하게 보기 때문일 수 있다.1
3.6.2함께 결정하는 방법
그래서 과학기술 문제의 결정에는 전문가와 시민이 함께 참여한다. 숙의형 공론화는 무작위로 뽑은 시민들이 전문가의 설명을 듣고,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과 토론한 뒤 의견을 모으는 방식이다. 우리나라는 2017년 신고리 원전 5·6호기 건설을 두고 시민 참여단의 공론화로 결정한 적이 있다. 좋은 결정을 위해서는 과학 자료를 정확하게 공유하고, 사실과 가치를 구별하여 토론하며, 결정의 근거와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3.6.3예제 풀이
발전 방식 A는 해마다 대기 오염으로 평균 2명의 사망을 일으키고, 방식 B는 1만 년에 한 번꼴로 5000명이 사망하는 대형 사고 위험이 있다. 두 방식의 연간 기댓값을 구하여라. 피해 크기를 1.2제곱으로 무겁게 보는 사람에게는 어느 쪽이 더 위험한가?
A의 기댓값은 2명/년, B는 \(\dfrac{1}{10\,000} \times 5000 = 0.5\)명/년이다. 기댓값으로는 B가 4분의 1로 안전하다.
1.2제곱으로 무겁게 보면 A는 \(1 \times 2^{1.2} \approx 2.3\), B는 \(\dfrac{1}{10\,000} \times 5000^{1.2} \approx \dfrac{27\,600}{10\,000} \approx 2.8\)이다. 이 사람에게는 B가 조금 더 위험하게 느껴진다. 즉 같은 자료에서 '기댓값이 작은 B가 낫다'는 결론과 '대형 사고가 두려운 B가 위험하다'는 결론이 모두 나올 수 있다. 그래서 공론화에서는 숫자를 바로잡는 토론과 가치를 나누는 토론을 구별해야 한다.
아래 탐구 카드에서 같은 과학 자료를 보고도 결론이 다른 까닭과, 시민들이 과학기술 문제를 함께 결정한 사례를 살펴보자.
-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스스로 선택한 위험(운전, 흡연)보다 남이 부과한 위험(공장, 발전소)을, 자주 일어나는 작은 사고보다 드문 대형 참사를 더 크게 느낀다. 이는 비합리라기보다 통제와 공정에 대한 가치가 반영된 것이다.
과학은 위험의 확률과 피해, 곧 사실을 밝히지만, 그 위험을 감수할지는 피해의 크기, 공정성, 통제 가능성을 어떻게 저울질하느냐는 가치의 문제이다. 그래서 숙의형 공론화처럼 시민이 정확한 자료를 바탕으로 사실과 가치를 구별해 토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처음 질문의 시민들의 결론이 다른 것은 자료를 잘못 읽어서가 아니라, 같은 사실 위에서 서로 다른 가치를 더 무겁게 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