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과 윤리
본문감염병이 퍼질 때 확진자의 이동 경로를 자세히 공개하면 접촉자를 빨리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공개된 정보로 누가 확진자인지 드러나 사생활이 침해되고 차별을 받을 수도 있다. 기술로 할 수 있는 일과 해도 되는 일 사이의 선은 누가, 어떻게 정해야 할까?
3.4.1같은 기술, 다른 결과
과학기술은 그 자체로 좋거나 나쁘지 않다. 같은 유전자 분석 기술이 병의 원인을 찾아 치료에 쓰이기도 하고, 사람의 유전 정보를 허락 없이 모으는 데 쓰이기도 한다. 생성형 인공지능은 그림과 글을 쉽게 만들게 해 주지만, 다른 사람의 작품을 허락 없이 학습하거나 가짜 영상을 만드는 데에도 쓰인다. 즉 기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와, 그것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다른 질문이다.
앞의 질문에 답하는 것이 과학이라면, 뒤의 질문에 답하는 것이 윤리이다. 과학기술과 윤리는 과학기술을 연구하고 쓰는 과정에서 지켜야 할 옳고 그름의 기준을 다룬다.
3.4.2판단에 쓰는 기준
과학기술을 쓸지 말지, 어디까지 쓸지 판단할 때는 몇 가지 기준을 함께 따진다. 먼저 그 기술이 사람과 사회에 주는 이익과 위험을 견주어 본다. 다음으로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충분히 알고 스스로 동의했는지 본다. 그리고 이익과 위험이 특정한 사람에게만 몰리지 않는지, 곧 공정한지를 본다.
사람의 생명과 존엄을 해치지 않는다. 연구 대상이나 정보의 주인에게 충분히 설명하고 자발적인 동의를 받는다. 개인 정보와 사생활을 보호한다. 이익과 부담을 공정하게 나눈다. 연구 과정과 결과를 정직하게 기록하고 알린다.
그림 1의 슬라이더로 공개 범위를 바꾸어 보자. 지역만 알리면 방역 효과는 작지만 개인이 드러날 위험도 작다. 방문한 가게와 시각까지 공개하면 방역 효과가 커지지만, 몇 가지 정보만 맞추어도 누구인지 알 수 있게 된다. 두 곡선은 함께 움직이므로, 어느 지점이 좋은지는 사회가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지에 따라 정해진다.1
3.4.3예제 풀이
어느 도시의 인구가 10만 명이다. 확진자의 성별(2가지), 나이대(10살 단위 8가지), 사는 동(20개 동)을 공개하면, 같은 조건을 가진 사람은 평균 몇 명인가? 여기에 다니는 직장의 업종(10가지)까지 공개하면 어떻게 되는가? 이 결과가 정보 공개에 주는 뜻을 말하여라.
세 정보를 함께 공개하면 사람들은 \(2 \times 8 \times 20 = 320\)개의 무리로 나뉜다. 인구가 고르게 퍼져 있다고 하면 한 무리는 평균 \(\dfrac{100\,000}{320} \approx 313\)명이다. 313명 가운데 한 사람이므로 누구인지 바로 알기는 어렵다.
업종까지 더하면 무리는 \(320 \times 10 = 3200\)개가 되고, 한 무리는 평균 약 31명이다. 실제로는 인구가 고르지 않아 어떤 무리에는 몇 명만 있을 수 있다. 그러면 이웃이나 직장 동료가 확진자를 쉽게 짐작하게 된다.
정보 하나하나는 사소해 보여도, 여러 개가 겹치면 곱의 법칙으로 무리가 빠르게 작아져 개인이 드러난다. 그래서 공개 범위를 정할 때는 방역에 꼭 필요한 정보인지와 함께, 정보를 합쳤을 때 개인을 알아낼 수 있는지를 따져야 한다. 아래 탐구 카드에서 실제 사례를 두고 공개 범위를 정해 보고, 생성형 인공지능의 쓰임도 함께 토론해 보자.
- 우리나라 방역 당국은 2020년 확진자 이동 경로 공개 지침을 고쳐, 성별·나이·직장명 같은 개인을 알아볼 수 있는 정보는 공개하지 않고 방역에 필요한 장소와 시간만 공개하도록 했다.
과학기술은 할 수 있는 일을 넓히지만, 그 일을 해도 되는지는 이익과 위험, 동의, 공정성, 사생활 보호 같은 윤리 기준으로 따로 판단해야 한다. 이 판단은 과학자 혼자가 아니라 사회가 함께 내린다. 그래서 처음 질문의 이동 경로 공개는 방역에 필요한 만큼으로 한정하고, 정보를 합쳐도 개인이 드러나지 않도록 범위를 정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