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몬의 작용 경로
본문놀라거나 긴장하면 부신에서 에피네프린이 나온다. 피 속 농도는 기껏해야 10억분의 1 몰 수준이다. 그런데 이 적은 양이 몇 초 만에 간세포의 글리코젠을 분해해 혈당을 눈에 띄게 올린다. 에피네프린은 세포막을 통과하지도 못한다. 막 밖에 붙은 호르몬 몇 분자가 어떻게 세포 안에서 수많은 포도당을 쏟아지게 할까? 그리고 막을 통과하는 스테로이드 호르몬은 왜 훨씬 느리게 작용할까?
2.2.1막 수용체와 2차 전달자
에피네프린이나 글루카곤처럼 물에 잘 녹는 호르몬은 세포막을 통과하지 못하므로 막 표면의 수용체에 붙는다. 수용체는 막 안쪽의 G 단백질을 활성화하고, G 단백질은 아데닐산 고리화 효소를 켠다. 이 효소는 ATP를 cAMP로 바꾸는데, cAMP가 세포 안에서 신호를 이어 전하는 2차 전달자이다. cAMP는 PKA를 활성화하고, PKA는 다른 효소들을 인산화해 켠다. 마지막에 활성화된 글리코젠 인산화 효소가 글리코젠을 포도당 1-인산으로 잘라 낸다.
신호 전달 경로의 각 단계에서 활성화된 효소 하나는 다음 단계의 분자를 여러 개 활성화한다. 단계마다 증폭 배율이 \(a\)이고 단계가 \(n\)개이면 전체 증폭은 \(a^n\)이다. 그래서 호르몬 분자 몇 개로도 세포 안에서 수많은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그림 1에서 증폭 배율을 바꾸어 보자. 단계마다 10배씩 늘면 다섯 단계를 지나 에피네프린 하나가 포도당 1-인산 10만 개를 만든다. 실제로는 단계마다 배율이 다르지만, 전체로 수만에서 수백만 배에 이른다. 그리고 각 단계가 이미 세포 속에 있던 효소를 인산화로 켜기만 하므로, 새 단백질을 만들 필요가 없어 몇 초 안에 끝난다. 신호를 끄는 장치도 함께 있어, cAMP를 분해하는 효소가 호르몬이 떨어지면 반응을 곧 멈춘다.1
2.2.2세포 안 수용체와 유전자 발현
에스트로젠, 코르티솔, 테스토스테론 같은 스테로이드 호르몬은 지질에 잘 녹아 세포막을 그대로 통과한다. 이들의 수용체는 세포질이나 핵 속에 있다. 호르몬이 붙은 수용체는 DNA의 특정 서열에 결합하는 전사 인자가 되어, 특정 유전자의 전사를 켜거나 끈다. 그 결과 새 mRNA와 단백질이 만들어져야 효과가 나타나므로, 작용이 나타나는 데 몇 시간에서 며칠이 걸린다. 대신 효과가 오래간다. 갑상샘 호르몬도 지질에 녹아 같은 방식으로 작용한다.
2.2.3예제 풀이
간세포 하나의 표면에 에피네프린 100분자가 붙었다. 수용체 하나가 G 단백질 10개를 켜고, 아데닐산 고리화 효소 하나가 cAMP 100개를 만들며, 이후 PKA, 인산화 효소 인산화 효소, 글리코젠 인산화 효소가 각각 10배씩 증폭한다고 하자. G 단백질 하나가 고리화 효소 하나를 켠다면, 포도당 1-인산은 몇 분자 만들어지는가?
에피네프린 100분자 → G 단백질 \(100 \times 10 = 10^3\)개 → 고리화 효소 \(10^3\)개 → cAMP \(10^3 \times 100 = 10^5\)개이다. 그 뒤 세 단계에서 10배씩 늘면 포도당 1-인산은 \(10^5 \times 10^3 = 10^8\)개, 곧 1억 개이다.
호르몬 분자 하나로 따지면 100만 배 증폭이다. 실제 cAMP 4개가 PKA 하나를 켜는 등 단계마다 사정이 다르지만, 이 정도 증폭 덕분에 피 속의 아주 적은 호르몬이 세포 전체의 대사를 바꾼다. 그리고 이 경로는 모두 이미 있는 효소의 스위치를 켜는 일이라 몇 초 안에 끝난다. 그래서 에피네프린은 위급한 순간에 근육과 뇌에 곧바로 포도당을 대 줄 수 있다.
아래 탐구 카드에서 막 수용체와 세포 안 수용체의 작용 경로를 비교하고, 각 경로가 어떤 상황에 알맞은지 추론해 보자.
- 1950년대 서덜랜드는 간 조직을 갈아 만든 추출액에서도 에피네프린이 글리코젠 분해를 일으키는 것을 보고, 그 사이를 잇는 물질로 cAMP를 찾아냈다. 그는 이 공로로 1971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세포막을 통과하지 못하는 호르몬은 막 수용체에 붙어 2차 전달자와 효소의 연쇄 반응을 일으키며, 단계마다 신호가 곱으로 증폭되어 몇 초 만에 큰 효과를 낸다. 세포막을 통과하는 스테로이드 호르몬은 세포 안 수용체와 함께 유전자 발현을 바꾸어, 느리지만 오래가는 효과를 낸다. 그래서 처음 질문의 에피네프린은 아주 적은 양으로도 신호 증폭 연쇄를 통해 몇 초 만에 수많은 포도당을 쏟아지게 한다.